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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3 : 디지털 호더

by longsalt

호더(hoarder), 라는 말을 처음 접한 건 미국 수사드라마에서였다. 집이 터져나가도록 물건을 가득 쌓아놓다가 결국 그 물건에 깔려 죽은 사람이 나오는 내용이었는데, 수사관들은 그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호더라고 지칭했다.

호더, 호딩, 저장강박증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나는 이 개념이 특히 애니멀 호더라는 형태로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아무래도 '물건'을 마구 쌓아놓는 것보다 어떤 '생명'을 그렇게 수집하듯 모아놓는 것이 충격적이라 많이들 보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주목받을 필요성이 있는 이슈라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클릭수를 땡길 만큼 자극적인 면이 있어서...

어쨌든. 호더라는 개념을 알게되고, 또 이와는 조금 다른 층위이기는 하나 미니멀리즘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인가 내 생활을 돌아보고 살림의 규모를 조정하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다. 모든 시도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욕이 좀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병적이라고 할 만큼 심각하게 집착하지는 않는 것 같고, 저 개념들을 알게 된 이후로는 때때로 내 생활을 돌아보고 경계하며 조심하고 있다.

최근 이 글을 읽었다. 경향신문의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에 실린 글로, 저장강박에 대해 다룬 책 몇 권을 소개하며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지금껏 익숙했던 물질을 쌓아두는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를 쌓아두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409091954005

 

[인스피아]간직하고픈 마음, 비워내는 게 답일까

‘디지털 저장강박(Digital hoarding)’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디지털 환경에서 수많은 기사, 음악, 영상들의 북마크, 메모, 사진 등을 잔뜩 모아두어 골치를 앓는 행동을 뜻하는데요. 정식 병

www.khan.co.kr

 

글을 읽고 웹브라우저 즐겨찾기 메뉴를 열어보았다. 마구잡이로 저장한 즐겨찾기 항목이 천 개도 넘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채 있었다. 저장장치 폴더를 열어보니 즐겨찾기보다 심각했다. 시시때때로 저장한 파일들, 대충 작성했다가 그대로 잊어버린 메모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그나마 매일 확인하는 이메일과 메신저는 깔끔한 편이었으나 딱히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물건은 눈앞에 보이니까, 내 생활공간을 차지하니까 그나마 빠르게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할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는 내 손에 만져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요즘처럼 하드디스크 저장공간이 테라바이트에 육박하는 시대에는 저장용량이 부족하다며 파일을 지우고 어쩌고 하는 일도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무언가 찾고자 하는 파일이 있을 때에도, 엉망진창인 폴더를 인식하기도 전에 그냥 검색 기능으로 간단하게 찾아버리게 된다.

불편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라고 넘기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애초에 나는 저것들을 왜 저장했는가. 필요해서, 열람하려고, 사용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나. 그런데 정작 받아놓고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제대로 열람한 파일도 몇 되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저런 '아이템'을 '획득'했으니 그만큼 내 '스탯'이 올라갔으리라 착각하고 위안한 걸 지도 모른다.

웹브라우저 즐겨찾기를 열고 하나씩 페이지를 확인한 뒤 지우거나 분류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양이 너무나도 많아서 오늘내일 안에 뚝딱 해버릴수는 없을 것 같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치워야 한다. 엉망진창인 폴더 역시 정리가 필요하다. 마침 사진 백업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언제 한번 마트에 갈 때 외장하드를 사 와서 오래 저장할 자료들은 옮기고 오래 저장할 필요 없는 자료들은 지워버리는 식으로 진행해 봐야겠다.

나름대로 잘하고 있다, 라고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또 새롭게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실망스럽고 피곤하지만 동시에 감사하다. 아직은 그래도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보는 기능이 남아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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