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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 오래된 필사

by longsalt

얼마 전에 다시 필사를 해볼까 고민하면서 필사와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과거 필사했던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잘못된 기억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깔끔한 장정에 좋은 펜으로 아름답게 적은,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올려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멋진 결과물은 아니다. 그저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쓰다 만 노트에, 마찬가지로 평소 쓰던 브랜드도 모를 젤펜으로, 글씨도 예쁘게 쓸 생각은커녕 뒤로 가면서는 오히려 신나게 날려쓰면서 꾸역꾸역 남겨놓았던 필사본이 있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깔끔한 글씨가 유지되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글씨가 날아다닌다...

옮겨 적은 것은 조르주 페렉의 책,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이다. 이충훈이 우리말로 옮겼으며 열린책들이 펴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서점에서 품절 상태이며 전자책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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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 | 조르주 페렉 - 교보문고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 | 단 하나의 문장으로 풀어낸 임금 인상법!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천재 악동으로 꼽히는 조르주 페렉의 작품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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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과거 이 단행본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현재도 이 책이 내 책꽂이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본가를 떠난 뒤 몇 번 이사하는 동안 여러 번 단행본을 처분해야만 했는데, 아마 그때 이 책 역시 정리했던 것 같다. 다만 확실히 정리했다는 기억이 없고, 단편소설과 그 해설만이 실려있는 얇은 책이니까, 어쩌면 다른 책 사이에 여전히 끼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제까지는 저 소설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오늘 이 필사 페이지를 찾아 다시 읽어보니 그때 느꼈던 감상부터 글씨를 눌러 적으며 느꼈던 뻐근함까지 흐릿하게 떠올라서 참 신기하고 즐거웠다. 기록이 기억의 보조장치가 되어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체감할 때마다 참 신기하다.

조르주 페렉의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은 마침표 없이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당시에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했던 지점은 이걸 한국어로 옮겼다는 부분이었다. 물론 작가가 이렇게 써낸 것 자체도 참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그걸 또 서로 그리 비슷한 언어도 아닌 불어-한국어 번역으로 옮겨냈다는 게 거의 무슨 서커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글씨로 옮겨 적어놓은 흔적을 다시 읽으면서도 그 감상은 여전하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의식의 흐름과 서사의 전개(사실 거창하게 서사... 라고 할만한 내용은... 아니긴 하지만...)가 형태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사람의 의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다가오는데,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출판사에게 지극히 감사할 따름이다.

기록은 참 신기하다. 분명 잊고 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영영 내 안에서 없어진 것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었던 감상인데, 고작 잉크자국 좀 남은 종이 몇 장이 이 모든 기억을 되살려준다. 아마 그래서 기록을 하라고 하는 걸 테고 기록을 해야 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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